사진 스타일은 소유될 수 있는가

사진가들이 은근히 자주 싸우는 문제가 있다.
“저 사람이 내 스타일을 베꼈다”는 말이다.

상업사진에서도 나오고, 웨딩사진에서도 나오고, 풍경사진에서도 나온다. 인스타그램에서는 거의 매일 일어난다. 누군가 특정한 장소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렌즈로, 비슷한 색감과 포즈를 만들어내면 곧바로 말이 돈다.

“저거 누구 따라 한 거 아니야?”

이 감정 자체를 우습게 볼 필요는 없다. 사진가는 자기 형식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쓴다. 어떤 빛을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의 노출을 밀고 가는지, 인물을 어떻게 세우는지, 색을 얼마나 죽일지, 그림자를 어디까지 남길지. 이런 것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사진처럼 보이는 표면이 생긴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스타일이 정말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서 한복을 입힌 인물을 세우고, 슬로셔터를 사용하고, 조명을 넣어 움직임과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보자. 충분히 인상적인 사진이 될 수 있다. 누군가 그 방식을 자기 지역과 상업사진 문맥 안에서 잘 조합했다면, 그 작업은 인정받을 만하다. 실제로 그런 방식이 특정 작가의 이름과 함께 알려졌다면, 그 작가가 시장 안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것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러니 다른 사람은 하지 말라”로 넘어가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슬로셔터는 누구의 발명이 아니다.
조명도 누구의 발명이 아니다.
한복도, 바닷가도, 역광도, 실루엣도, 장노출도, 움직임의 흔적도 어느 한 사진가의 사유물이 아니다.

사진의 기술은 이미 오래전에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왔다. 조리개, 셔터, 감도, 렌즈, 거리, 빛, 프레임, 후반작업. 이 제한된 요소들을 조합해 사진은 만들어진다. 여기에 플래시, 컬러젤, 팬닝, 다중노출, 습판, 적외선, 핀홀, 대형카메라 같은 변주를 더해도 대부분은 이미 누군가 해본 일이다.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많은 장면은 대개 발명이 아니라 재배치에 가깝다.

그래서 사진가가 “이건 내가 만든 기법”이라고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정말로 발명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늦게 발견한 것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사진의 역사를 조금만 뒤져도 비슷한 실험은 대개 나온다. 선대 작가들이 했고, 광고사진가들이 했고, 영화 촬영감독들이 했고, 이름 없는 동네 사진관에서도 이미 해봤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베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법적으로 기법을 독점하기 어렵다는 말과, 작가로서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남의 사진을 보고 장소, 구도, 포즈, 조명, 색감, 후반작업, 심지어 홍보 문구까지 거의 그대로 가져와 자기 작업처럼 내놓는다면 법정에 가지 않아도 이미 끝난다. 사진계는 생각보다 좁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기억한다.

소송보다 먼저 붙는 말이 있다.

“저 사람은 누구 짭이네.”

이 말은 꽤 치명적이다. 저작권 침해로는 빠져나갈 수 있어도 작가로서는 빠져나가기 어렵다. 법은 기법의 소유를 쉽게 인정하지 않지만, 평판은 훨씬 냉정하게 작동한다. 어떤 형식이 누군가의 이름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그 형식을 너무 노골적으로 가져오면 보는 사람은 금방 알아차린다. 비슷한 사진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작가로 기억되는 순간, 더 멀리 가기는 어려워진다.

마이클 케냐, Solseom / Pine Trees
대한항공 광고 이미지, 솔섬

마이클 케냐와 대한항공의 솔섬 논란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장소, 비슷한 구도, 비슷한 분위기의 풍경사진이 저작권 침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감정적으로는 많은 사진가들이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유명 작가가 오랫동안 쌓아온 미감과 장소성이 광고 이미지 안에서 비슷하게 호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은 케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유사성은 있어도 저작권 침해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사진가에게 불편한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내 스타일’이라고 믿는 것 중 상당수는 법적으로 보호받기 어렵다. 같은 장소를 찍을 자유, 비슷한 구도를 시도할 자유,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 자유는 쉽게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진가는 무엇을 지켜야 할까.

기법을 울타리 치는 방식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누군가 내 조명을 따라 했다고 분노하고, 누군가 내 색감을 흉내 냈다고 화를 내고, 누군가 내가 찍던 장소에 갔다고 금지선을 그어봐야 별 효과가 없다. 사진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은 늘 따라 하고, 배우고, 훔쳐보고, 바꾸고, 실패하고,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 안에서 발전해왔다.

문제는 따라 했느냐가 아니다.
거기서 어디까지 갔느냐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누군가를 닮는다. 학생은 선생을 닮고, 워크숍 참가자는 강사를 닮고, 젊은 작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를 닮는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그 닮음에 계속 머무는 일이다. 남의 형식을 빌렸다면 언젠가는 자기 질문으로 갚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진은 아무리 잘 찍혀도 결국 남의 문장으로 쓴 자기소개서가 된다.

사진에서 형식은 독점의 대상이라기보다 계보의 대상이다.
누가 먼저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어디까지 밀고 갔는가가 더 오래 남는다. 같은 장노출이라도 어떤 사람은 장식으로 쓰고, 어떤 사람은 시간의 감각으로 만든다. 같은 플래시라도 어떤 사람은 효과로 쓰고, 어떤 사람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쓴다. 같은 한복과 바닷가라도 어떤 사람은 예쁜 웨딩사진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기억과 장소와 몸의 관계를 건드릴 수 있다.

결국 차이는 기법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법 이후에 무엇이 있느냐가 작가를 가른다.

사진가가 자기 스타일을 지키고 싶다면, “하지 마라”고 외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더 깊이 가는 것이다. 더 오래 하는 것이다. 더 복잡한 관계를 만들고, 더 정확한 질문을 만들고, 그 형식이 왜 자기에게 필요한지 증명하는 것이다.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표면에 자기 이름을 걸 것이 아니라, 남들이 쉽게 따라 올 수 없는 관점과 내용을 쌓아야 한다.

기법은 금방 복제된다.
스타일도 언젠가는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오래 바라본 시간, 그 대상과 맺은 관계, 왜 그 이미지를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사진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슬로셔터가 아니다.
조명 공식도 아니다.
특정 장소도 아니다.

끝까지 자기 사진 안에서 증명해야 하는 것은 관점이다.
그리고 관점은 금지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찍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남는다.

권학봉 – 사진작가

2 Comments

  1. 마이클 케냐의 일례처럼 단일 사진에 대해서는 외형적인 유사성이 침해라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풍경 사진 같은 장르는 단 한 장의 컷만으로 작가의 철학이나 관점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태생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ㅎㅅㅎ;;;

    제 작품과 제 자신의 관계성을 어떻게 엮어야할까 고민 중인 나날입니다.

    1. 맞습니다. 특히 풍경사진은 단 한 장의 컷만으로 작가의 철학이나 관점을 온전히 증명하기 어려운 장르라서, 외형적으로 비슷한 사진을 봤을 때 침해처럼 느껴지는 감정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다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으로 작가가 무엇을 계속 말해왔는가인 것 같습니다. 한 장의 유사성보다 더 강한 것은 작업 전체의 방향과 지속성,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과 작가 자신 사이의 관계성이겠지요.

      그 고민이 깊어질수록 결국 자기 작업의 언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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