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권의 시대, 거리 사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한국 사회에서 스트리트·캔디드 사진이 위축되는 이유와 그 이후의 문제

한국에서 카메라를 드는 행위는 어느 순간부터 순수한 관찰의 몸짓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특히 거리에서 사람을 향해 카메라를 드는 순간, 그 행위는 쉽게 의심의 시선 안으로 들어간다. 무엇을 찍는지, 왜 찍는지, 어디에 올릴 것인지, 허락은 받았는지, 초상권은 해결했는지라는 질문이 사진보다 먼저 도착한다. 사진가는 아직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해명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거리의 장면을 읽고 기록하려는 행위는 점점 더 자연스러운 창작 행위가 아니라, 잠재적 문제 상황처럼 취급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아무 이유 없이 생긴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카메라와 휴대폰은 오랫동안 불법촬영 범죄의 도구로 반복해서 등장했다. 성폭력처벌법은 카메라 등을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의사에 반해 촬영하는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법적 규정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정당한 경계심이 점차 사진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확장되었다는 데 있다. 카메라가 기록의 도구이기 전에 의심의 도구가 되었고, 그 결과 공공장소에서의 사진 행위 전체가 사회적 긴장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이러한 인식은 몇몇 상징적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지상파 방송사의 전직 앵커가 지하철역에서 휴대전화로 여성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건은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유명인의 일탈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위치에 있던 인물조차 휴대폰 카메라를 범죄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공공장소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을 향한 대중의 불신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몰카”라는 단어는 특정 범죄를 지칭하는 말을 넘어, 동의 없는 촬영 일반을 의심하는 강력한 정서적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사라졌다. 불법촬영은 범죄다. 타인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삼거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촬영하거나, 그것을 유포하거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행위는 강하게 처벌되어야 한다. 반면 스트리트 사진과 캔디드 사진은 본질적으로 다른 맥락에 놓인다. 그것은 거리와 도시, 사람과 사회, 우연한 장면과 시대의 표정을 기록하려는 사진적 행위다. 물론 그 안에도 윤리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곧 범죄라는 판단은 전혀 다르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전에 먼저 같은 상자 안에 넣어버린다는 데 있다.
초상권에 대한 인식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과잉 단순화되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사람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공개하면 거의 자동으로 “초상권은 받았나요?”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이 질문은 때로 정당하다. 광고, 홍보, 상업적 이용, 조롱, 혐오, 악의적 편집, 사적 공간 침해의 경우라면 동의와 권리 보호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우연히 포착된 사람의 모습이 예술적·다큐멘터리적 맥락 안에서 사용되는 경우까지 모두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면, 거리 사진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초상권은 인격권의 문제이지, 공공장소에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미지를 사전에 금지하는 절대적 봉인이 아니다.
한국의 현실은 법보다 인식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법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구체적 맥락을 따져야 하지만, 온라인 댓글과 일상적 반응은 훨씬 단순하다. “허락 없이 찍었다”, “얼굴이 보인다”, “초상권 침해다”, “범죄 아니냐”라는 식의 판단은 복잡한 맥락을 생략한다. 이때 사진가는 작품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피의자처럼 변명해야 한다. 이 분위기 안에서 스트리트 사진은 장르가 아니라 위험 행동이 된다.

하지만 스트리트 사진과 캔디드 사진은 몰래 찍는 기술이 아니다. 캔디드는 촬영 방식에 가깝고, 스트리트는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가깝다. 캔디드 사진은 피사체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스트리트 사진은 그 순간이 도시, 사회, 인간의 관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읽어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모든 캔디드 사진이 스트리트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스트리트 사진이 반드시 캔디드일 필요도 없다. 거리에서 몰래 사람을 찍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스트리트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인물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진이 범죄적 시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스트리트 사진은 타인을 사냥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리의 구조, 빛, 몸짓, 표정, 간판, 속도, 계급, 유행, 불안, 침묵이 한 프레임 안에서 우연히 만나는 순간을 읽는다. 사람은 그 안에서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단순한 표적은 아니다. 좋은 스트리트 사진은 개인을 소비하는 대신 시대를 드러낸다. 반대로 나쁜 캔디드 사진은 타인의 무방비함을 소비한다. 바로 이 구분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해야 할 일은 거리 사진 전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이 기록이고 어떤 사진이 착취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정교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문제는 특히 초보자와 비전문가에게 더 가혹하게 작동한다. 이미 오랫동안 거리에서 작업해온 사진가들은 경험적으로 위험을 피하고, 장면을 읽고, 문제가 생겼을 때 설명하는 방법을 안다. 촬영해도 되는 장면과 피해야 할 장면을 감각적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제 막 스트리트 사진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다르다. 카메라를 드는 순간 몸이 굳는다. 시선이 흔들리고, 셔터를 누르는 타이밍이 늦어진다. 그 위축된 몸짓은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인다. 누군가 “왜 찍으세요?”라고 묻는 순간, 사진가는 작업을 설명하기도 전에 당황한다. 바로 그 짧은 망설임이 그를 더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만든다.
한국에서 스트리트 사진은 법보다 먼저 몸에서 무너진다. 카메라를 든 사람의 어깨가 굳고, 손이 느려지고, 시선이 도망가는 순간, 거리의 장면은 이미 사라진다. 사진가는 장면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을 살피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이 장르는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여전히 찍는다.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점점 거리에서 카메라를 꺼내지 않는다. 장르가 사라지는 방식은 극적이지 않다. 어느 날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둘 시도하지 않게 되면서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히 사진 애호가들의 취미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거리 사진은 한 사회가 자기 시대를 기억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다. 우리는 과거의 도시를 사진으로 기억한다. 시장의 풍경, 버스정류장의 사람들, 공장 앞의 노동자, 학교 앞의 학생들, 골목의 아이들, 집회와 축제, 낡은 간판과 옷차림, 계절과 표정과 생활의 밀도는 모두 누군가가 거리에서 카메라를 들었기 때문에 남았다. 당시에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사회의 시각적 기억이 된다.

만약 오늘의 한국 거리가 충분히 기록되지 않는다면, 미래의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훨씬 빈약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서울, 부산, 광주, 대구, 제주, 지방 도시와 시장과 지하철과 공원과 골목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예술적·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기록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위축된다면, 남는 것은 홍보용 이미지와 감시카메라 영상과 플랫폼에 최적화된 셀프 이미지뿐일 것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기억으로는 너무 가난하다. 범죄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범죄가 아닌 기록까지 함께 위축된다면, 그 피해는 현재의 사진가만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인이 짊어지게 된다.
해외의 사례는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미국의 경우, 공공장소에서 명백히 보이는 대상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연결된 권리로 강하게 보호된다. ACLU는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대상, 교통시설, 연방 건물 외부, 공무 수행 중인 경찰과 공무원도 촬영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물론 미국에서도 사유지, 상업적 이용, 괴롭힘, 사생활 침해 문제는 별도로 다뤄진다. 그러나 기본 출발점은 비교적 분명하다.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것은 원칙적으로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 역시 참고할 만하다. 런던 경찰청은 공공장소에서 일반 시민과 언론이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는 데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으며, 경찰이 공공장소 촬영을 일반적으로 중단시킬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안내한다. 또한 경찰이 촬영된 이미지를 임의로 삭제하도록 요구할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것은 단지 사진가에게 자유를 주는 문제가 아니다. 현장에서 경찰과 시민이 어떤 기준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사회적 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유럽을 단순히 “사진이 자유로운 곳”으로 말할 수는 없다.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는 이미지권과 개인정보 보호가 강한 편이고, 공공장소에서 촬영된 이미지라 하더라도 사생활 보호와 충돌할 수 있다. 즉 미국식 모델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유럽식 보호주의를 그대로 따르는 것도 한국의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촬영 자유와 프라이버시 보호를 장소와 목적에 따라 나누는 더 정교한 기준이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공공장소와 사적 공간의 분리다. 거리, 광장, 시장, 축제, 집회, 공공행사처럼 누구에게나 열린 장소에서 우연히 포착된 장면은 예술, 보도, 기록, 비평의 목적 안에서 폭넓게 허용될 필요가 있다. 반대로 화장실, 탈의실, 병원, 주거지, 학교 내부, 사적 모임, 신체적·성적 수치심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 취약한 대상에 대한 소비적 촬영은 훨씬 강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같은 카메라라도 어디에서,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왜 찍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촬영 행위와 사용 행위의 분리다. 사진의 윤리적·법적 문제는 단순히 셔터를 눌렀는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디에 공개했는가, 어떤 문맥에 놓았는가, 상업적으로 이용했는가, 조롱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는가, 개인을 특정해 피해를 주었는가가 중요하다. 공공장소에서 촬영된 장면을 예술적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광고나 조롱, 성적 소비, 신상털기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다. 한국 사회는 이 차이를 더 분명하게 언어화해야 한다.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현장 대응 가이드라인이다. 지금은 누군가 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누군가 항의하고, 경찰이 출동하면 상황은 쉽게 감정 싸움으로 변한다. 촬영자도, 피촬영자도, 경찰도 명확한 기준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일단 지우세요”, “일단 경찰서 가시죠”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기록 행위를 위축시키는 방식이다. 공공장소에서의 촬영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되, 성적 목적, 스토킹, 괴롭힘, 상업적 도용, 사적 공간 침해, 명백한 피해 발생의 경우에 제한적으로 개입한다는 기준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사진가 내부의 윤리다. 공공장소 촬영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무 사진이나 찍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진가는 법의 허용선보다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특히 아동, 노인, 장애인, 노숙인, 사고 피해자, 빈곤이나 질병 등 취약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촬영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거리 사진의 자유는 약자를 소비할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를 기록할 자유이며, 그 사회 안에 있는 인간을 존엄하게 바라볼 책임과 함께 존재한다.
결국 한국에서 스트리트 사진이 사라지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불법촬영 범죄는 실제로 존재했고, 그에 대한 사회적 분노와 공포는 정당하다. 초상권과 프라이버시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정당한 보호의 언어가 모든 공공장소 촬영을 의심하고 위축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손실을 만들게 된다. 범죄를 막는 사회는 필요하다. 그러나 기록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스트리트 사진은 거리의 사람을 훔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는 표정을 기록하는 일이다. 캔디드 사진 역시 몰래 찍는 쾌감에 머물 때는 위험하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몸짓과 사회적 장면을 읽어내는 방식이 될 때 사진의 중요한 언어가 된다. 문제는 카메라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카메라가 무엇을 향하고, 어떤 태도로 세계를 대하며, 어떤 맥락 안에서 이미지를 남기는가이다.
초상권의 시대에 거리 사진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공공장소의 기록 자유와 사적 공간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분리하고, 범죄적 촬영과 예술적·다큐멘터리적 기록을 구분하며, 촬영 행위와 사용 행위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면, 거리 사진은 다시 가능해질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 정교한 기준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범죄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미래의 시각적 기억까지 함께 지워버리게 될 것이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각 사안에 대해 법을 적용하는 것은 그동안 수많은 판례가 축적되었기에 그리 문제되지는 않아 보이는데, 문제는 현장에서 촬영대상자가 촬영자에게 촬영의 위법함을 주장할 때 각 당사자(촬영자, 촬영대상자, 경찰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있다고 보입니다. 국가중요시설 및 그 시설 직원에 대한 촬영과 같은 경우 외에는 일반적으로 성적 욕망 충족을 위한 촬영에 해당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위법함이 촬영자가 ‘성적 욕망’의 충족의 고의를 가지고 촬영행위로 인하여 촬영대상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줄 수 있는 경우가 어떠한 경우인지를 현장에서 단번에 파악하고 조치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사실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과 관련하여 “촬영한 부위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타인의 신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객관적으로 피해자와 같은 성별, 연령대의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고려함과 아울러, 당해 피해자의 옷차림, 노출의 정도 등은 물론, 촬영자의 의도와 촬영에 이르게 된 경위, 촬영 장소와 촬영 각도 및 촬영 거리, 촬영된 원판의 이미지, 특정 신체 부위의 부각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구체적·개별적·상대적으로 결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2008. 9. 25. 선고 2008도7007 판결). 이러한 경우를 판단하려면 결국 현장에서 해결할 수는 없고 수사기관의 수사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은 억울함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사건이 종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촬영자가 성적 욕망을 충족하려는 고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해당 촬영행위를 통해 촬영대상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재판에 넘겨져 시간과 비용을 허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촬영자가 오히려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도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사법기관이 기준을 정립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업계 차원에서 기준을 정립하여 일반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협회에도 법률가가 있을테니 그동안의 판례를 종합하여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이를 수사기관과 함께 공유하며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시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준이든 명확하게 적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바, 결국 촬영자가 촬영이라는 행위를 하기에 앞서 왜 촬영하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일관된 인식을 갖고 촬영에 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승급 축하드립니다.^^
말씀처럼 이 문제는 법리보다도 현장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판례는 쌓여 있어도 실제 현장에서는 의도와 맥락을 바로 가려내기 어렵고, 그 과정에서 정상적인 촬영자까지 괜히 위축되거나 곤란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말씀하신 업계 차원의 가이드라인 정리도 꼭 필요해 보입니다. 결국 사진가 스스로도 왜 찍는지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부분에 저도 많이 공감합니다. 깊이 있는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만약 오늘의 한국 거리가 충분히 기록되지 않는다면, 미래의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훨씬 빈약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서울, 부산, 광주, 대구, 제주, 지방 도시와 시장과 지하철과 공원과 골목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예술적·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기록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위축된다면, 남는 것은 홍보용 이미지와 감시카메라 영상과 플랫폼에 최적화된 셀프 이미지뿐일 것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기억으로는 너무 가난하다. 범죄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범죄가 아닌 기록까지 함께 위축된다면, 그 피해는 현재의 사진가만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인이 짊어지게 된다.
거리 사진이 예술적/기록적인 성격으로 사회 기여 한다는 점에선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점을 강조하다보면, “예술적/기록적이지 않은 (혹은 아직 그런 평가를 받지 못 한) 거리 사진은 찍으면 안되는거냐?” 내지는, “어떤 사진이 거리 사진으로서 가치가 있는가?” 라는 논쟁으로 번지게 되고, 이는 (저를 포함한) 많은 거리 사진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을 주저케 만드는 일이 된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단순한 유희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건 거리 사진가들에게 책임감과 경각심, 그리고 사명감을 가지게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자기 검열은 커질 것이며 “그냥 장난으로 찍는거면서 지네가 예술하는 줄 안다.”라는 비아냥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예술성과 기록성은 당대의 대중이나 제도권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어쩌면, 저는 “그냥 장난”으로라도 찍을 수 있는 자유를 강조하는게 더 낫지 않나라고도 생각합니다.
승급 축하드립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제가 말한 건 “이런 사진은 고상하니 허용하고, 저런 사진은 별거 아니니 막자”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건 어떤 사진이 더 가치 있냐를 가르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불법이고 무엇은 합법적인 기록과 표현인지 그 경계를 좀 더 분명하게 공론화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야 괜한 자기검열만 커지는 상황도 줄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자유롭게 찍을 수 있는 영역도 더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