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프랭크 :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

유저사진강좌&팁

로버트 프랭크 :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

26 stormwatch 1 4172 0 0

 

 

 

2002_03_01.jpg2002_03_02.jpg
 
2002_03_03.jpg
 
2002_03_04.jpg 
 
창작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포착된 자신의 감각을 재현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의 생산물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그 작품이 있게 한 본질적인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이때 특히 시각예술에서 생산된 작품은 일종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부구조로서 출현하는 지표(인덱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부구조로서 부재하는 그 원인성(본질)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시각적으로 출현한 지표는 그 배경(fond)으로 간주되는 본질을 부재의 형태로 은닉하고 있고 물리적 원인 관계로 이해되는 이들 두 관계에서 본질(최초의 동기)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지표(시각적 출현)에 앞선다. 예를 들어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린 유명한 검은 초상은 모델의 검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모델을 인간이라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을 자신의 감각대로 번역한 결과물이며 또한 폴 클레의 그래픽적 색 나열 역시 현실의 대상이 아닌 음악의 순수함으로부터 시각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검은 얼굴과 색 그래픽은 시간적으로 작가가 과거 상황이나 대상과의 경험에서 포착된 감각의 음색(impression/timbre) 혹은 생성(genese)으로부터 시각적으로 전이된 결과물이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최초의 음색(철학적으로 내재적 형상)들은 단지 작가의 직감(intuition)에 의해서만 포착되는데 현실적으로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존재(탈-코드/시뮬라크르)들이다. 그와 같이 작품은 이러한 존재의 신호들을 색과 선, 면 등의 조형적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조형적 언어가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 더 정확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를 이용하는 경우 그 재현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사진 특성상 사진은 대상에 대한 그 어떠한 인위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특별한 조형적 번역(연출사진)을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사진에서 본질은 시각적으로 “부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 만약 클레가 카메라를 이용했다면 그가 바이올린 음에서 감지한 음색들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파스텔과 같은 색과 선의 조형적 번역이 아닌 단지 있는 그대로의 상황적 재현에만 가능하지 않는가 ?
 
그럴 경우 클레는 자신이 포착한 감각의 음색을 암시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바이올린 악보 피아노 공간 등 그 음색을 유발시킨 오브제나 상황을 찍을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음색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이면에 부재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그때 시각적인 출현은 이러한 부재를 은닉한 인덱스로서 음색 혹은 분위기를 위한 재현 이미지 이외 그 어떠한 언어학적 의미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진을 소위 “영상사진”이라고 한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재현 체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방출된 작가의 주관적 인상을 은닉한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들 특히 거의 현존하는 신화로 간주되는 그의 사진집 “미국인(The Americans)”은 현대 영상사진의 결정적 조건을 짓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당시 객관적 사실성과 사건 중심의 보도사진의 흐름에서 프랭크 이후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그의 주관적 이미지를 하나의 모델로 추종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미국인”의 출간은 적어도 외관적으로 현대사진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① 게다가 프랭크의 사진은 최근(특히 80년대 이후 유럽) 후기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진 인덱스적 관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이론적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와 사진 혹은 사진과 사회와의 객관적 관계나 역할에서 코드-의미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분석(현실의 변형)에서 볼 때 다소 생소하기도 하다.
 
프랭크의 사진은 단순한 코드 분석을 넘어 두 가지 주관적 관점에서 동시에 관찰된다 : 하나는 사진을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음색의 재현(영상사진)으로 보는 관점과 또 하나는 사진을 모두에게 공유된 현실의 주관적 경험 혹은 공통된 내적 인상으로 이해되는 관객의 관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보다 함축적인 방법으로 프랭크의 몇 몇 사진들을 모델로 하여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가 “미국인”을 만든 때는 1955-56년이다. 당시 50년대 전반은 공화국의 회귀, 냉전, 한국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상 생활 정상화와 안정과 균형 그리고 경제 발전을 목표로 정치 사회적 관계가 적절히 유지되던 시대였다. 여하간 50년대 미국 사회는 엄청난 물질적 확장과 미래의 풍요로움이 기대되던 시대로 모든 중요한 사항은 공통된 아이디어와 함께 명분과 이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중 의식 속에서 그 동안 억압된 상태로 있었던 분쟁의 에너지는 경제발전의 명목 하에 지속적인 경제적 추진력으로 전이되었고 경제는 또 그렇게 실패 없이 발전했다. 프랭크의 의도는 정확히 당시 긍정적인 대중 의식에 거역하는 반-이미지 즉 지나치게 코드화 되고 상징화된 미국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일종의 우상파괴였다. 의심할 바 없이 당시 그가 재현한 반-이미지들은 흔히 소외와 빈곤 허무 등과 같은 반 물질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들이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규명하지 못한 존재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프랭크의 “미국인” 사진집은 결정적으로 전통적 사진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반 - 사진” 즉 탈선(형상 이탈)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우선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대중의 눈에 비평적인 시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인데 반-사진적인 이탈은 근본적으로 대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즉 주체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은밀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유럽적 시각에 관계하는 것으로 미국에 이민 온 외국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경우를 재현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주관적 재현은 장 콕도가 그의 사진을 “반사하는 거울”로 말한 것처럼 자신이 대상이나 상황에서 포착한 “순수 직감”으로부터 재현된 사진 이미지로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영화 혹은 소설 시나리오와 같은 3인칭 역사가 아닌 단지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1인칭 자화상이었다. ②  이는 곧 일반적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적인 독백으로의 전환 즉 재현에 있어 주체의 변화를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주제의 변화와 조형적 형태와 구성에서 전통적 규범의 이탈(불규칙, 대칭, 절단, 동요, 흐림 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들은 사실상 현대 사진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들로 간주되는데 가장 좋은 예로 미국 남부의 이국적 풍경을 보여주는 프랭크의 사진(사진 2)과 이와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1930년대 워크 에반스의 사진(사진 3)과의 비교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공통적으로 두 사진은 당시 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인 차를 소재로 하고 있고 그 재현 방식에서도 거의 같은 정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두 사진 모두 삶의 방식으로 간주된 차를 소재로 미국의 자연적이고 “내부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지만 프랭크의 사진은 에반스가 재현한 객관적 보고로서의 사회적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오늘날 초가집과 주유소가 병치된 시골 풍경과 같이 단지 자연과 인공의 병치에서 발생하는 대상의 엉뚱하고 야릇한 인상을 재현한 이미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에반스의 차는 부의 상징인 사회적 지표로 나타나고 프랭크의 차는 일종의 인간과 물질 사이의 부조화에서 암시되는 괴물 즉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전자는 “사물 위에서(sur) 의미의 재현”인 반면 후자는 “사물에 반하는(contre) 섬광 혹은 인상의 재현”이다(Henri Van Lier). 당시 사람들은 사실상 프랭크의 사진이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인 지극히 주관적인 접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에반스의 사진과 같이 삶의 방식이나 사회학적인 보고서로서 일종의 사회적 비난으로 믿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의 사진이 다시 1930년대 F.S.A의 사진이 되길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이 프랭크의 사진은 사물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그것들에 반사된 음색의 재현이다. 이러한 재현은 그림의 경우와는 반대로 마치 심벌즈의 한방처럼 찍는 순간 동시에 이러한 사진적 음색이 자동으로 생성된다(자동생성). 이는 곧 퍼스의 유형학적 의미로 인덱스화 된 것(indexation)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que)”이다. 오늘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유형이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중요한 하나의 이론적인 모델로서 재조명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음색의 재현에 있고 또한 필립 뒤봐가 “사진과 함께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행위 밖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라는 사진적 결론 역시 이미지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프랭크 자신의 순수 직감 즉 생성에 관계하고 있다.

  사진적 음색은 의미나 상징을 말하는 은유가 아니라 지표를 말하는 환유로 간주된다. 거의 대부분의 프랭크 사진들은 재현된 어떤 상황이 “무엇을 뜻한다”라는 객관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조짐을 보인다”라는 상황적 인상만 누설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뉴멕시코 286번 국도(US 286 New Mexico)”사진이나, “뉴욕가 34번지”(사진 4)를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이미지의 출현으로서 나타나는 도로와 선은 의미적 관점으로 볼 때 사실상 수수께끼이다. 이것들은 단지 응시자에게 황량하고 허무하고 공허한 무엇을 상기시키는 어떤 형이상학적 부재의 인덱스일 뿐이다. 또한 작가인 프랭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 사진은 그가 도로를 달리다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잡은 의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직감 ③ 에 따라 단지 이미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사진적 행위의 “잔여물”로서 남게 된 이미지, 달리 말해 물질적 출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부재이외 사실상 의미적으로 해석 불가능한 이미지이다.

  유일하게 개인의 상황적 인상으로만 이해되는 사진, 말하자면 프랭크 사진 유형은 의미나 논리 밖에서 일종의 “신호의 순수 서정시”나 혹은 사진가 자신의 “헛소리”로 간주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경험적인 영역에서 기억의 연상에 의해 환원된다. 이때 기억적 확장은 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처럼 지극히 주관적 확장을 한다. 출현과 부재가 섞여 만들어진 “분위기 혹은 인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인상이나 과장된 인상이 아닌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 동시에 공통된 우리들의 단순한 경험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술집에서 또한 자신의 집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경험”(Henri van Lier)이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기억적인 이중인화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예컨대 A라는 해변은 B라는 교회 위에 겹쳐 있고, 그 교회는 C라는 얼굴 위에 겹쳐 있고 또 그 얼굴은 ... 이러한 주관적 확장은 또한 동일한 대상 위에서 응시자의 경험에 따라 각자 달리 해석되는 연상의 개인적 “경향”과 같은 맥락(인덱스의 확장)을 가진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순간을 자르는 결정적 순간이나 유일한 사건을 만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거의 부동의 진술과 부재의 출현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재현하는 프랭크 사진에서 보여지는 탁월한 미학이다.

  로버트 프랭크는 그 자신이 반 - 미학적인 직감적 사진가로 자처한다. 그는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반응 쉽게 말해 그가 미국을 주파하면서 느낀 단순한 인상들이다 : “나는 사진들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내가 느낀 것들이고 완전히 직감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한 것이 없었다.” 작크 크루악이 “주 - 박스가 장례식 관보다도 더 슬픈지 알 수 없다”고 말하듯이 부재는 우리 모두의 죽음을 암시한다. 도로, 식당, 호텔의 침실, 이발소의 의자 혹은 공원의 의자(사진 1)는 비어 있다. 출현은 곧 부재의 신호이며 직감은 바로 이러한 끝없는 신호들을 잉태한다. 또한 그 신호들의 지시대상들은 의미와 논리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것과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는 존재의 시뮬라크르들이다. ●
 
(주)
① 그러나 프랭크의 사진을 “내적 형상의 재현”이라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최초의 사진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오히려 20세기 앗제와 브레송의 사진을 잇는 두 분수령에서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의 영상사진은 거의 완전한 정신적 재현으로 현대 사진의 결정적인 방향을 세운다.

②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사실상 프랭크의 전 사진들을 통해 볼 때 그의 예술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 - 소설”인 동시에 “사진가의 생생한 체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을 서술화된 “스토리 사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독백으로 간주되는 “미국인”은 물론이며 영화 플로라이드 흑백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로 나타나는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도 이러한 취향은 분명하다. 특히 1978년 흑백 폴로라이드 사진에서 두 장의 자신의 모습을 붙여 만든 “Selfportrait, at 55, It is like me”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랭크의 많은 사진에서 “그것은 나와 같다(It's like me)”라고 기입한 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전혀 나르시즘과 관계가 없다.

③ 단순한 개인적 심경으로 들뢰즈의 용어로 하나의 사건(evenement) 혹은 표면 효과(les effets de surface)로 볼 수 있다.
주요 참고 도서

Les Americains, texte de Jack Kerouac, Delpire, Paris, 1958, reimp., 1985.
Robert Frank, texte de Rudy Wurlitzer, Delpire, Paris, 1976.
Robert Frank, la photographie, enfi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n  11/12, Paris, 1984.
Michel Frizot, "Robert Frank, ailleurs et maintenant", Cliches n  25, 1986 pp. 48-53.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파리 1949년
(사진 4) 뉴욕가 34번지, 1949년
(사진 2) 로버트 프랭크, 캘리포니아 롱비치, 1955-1956년
(사진 3) 워크 에반스, 농장, 1931년
 
 


 

 

[이 게시물은 권학봉님에 의해 2018-04-04 21:07:16 사진조명 동영상 강의에서 복사 됨]

1 Comments
4 초보임다 2018.11.17 11:02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