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초상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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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상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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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상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
최봉림


 

이 글은 수사학의 문채 (figure), 은유 (metaphor)와 환유 (metonymy)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인물, 특히 그의 얼굴을 도상 기호 (iconic sign)로써 재현”한다고 정의되는 초상을 보다 엄격하게 규정하고, 그 의미작용의 기제를 객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1960년대 이후의 형식주의 문예비평이 애호한 이 수사학의 개념을 통해, 얼굴 아닌 신체의 부분으로 특정 개인을 재현하는 도상 역시 초상의 정의에 부응하며, 초상의 의미작용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우선 은유와 환유를 언어학적으로 규정하기로 하자.
소쉬르 (F. Saussure)는 언어체계와 수행을 결정짓는 두 종류의 언어 요소간의 관계를 설정했다. 첫째는 언술의 한 지점에서 실현될 수 있는 잠재적 언어요소와의  기표 (signifiant)의  유사성 그리고/혹은  기의 (signifié)의 유사성 때문에, 기억 속에서 잠재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연상관계 (rapport associatif)이며, 둘째는 언어의 선조적 성격 (linear character)에 의거한 관계로서, 언술에서 구성요소들이 순차적으로 결합하는 연사관계 (rapport syntagmatique)이다. <<연사관계는 구성요소들을 현전한다. 둘 이상의 어사들이 행해진 언술의 연속 속에 동시에 현존한다. 그와는 반대로 연상관계는 어사들을 기억의 잠재적 연속 속에 부재하는 상태로 연결시킨다.>>

야콥슨 (R. Jakobson)은 소쉬르가 설정한 언어현상의 이 두 양태를 새로운 용어로 되풀이한다. 즉 어떤 어사가 다른 어사들과 선조적으로 연결되는 연사관계를 ‘결합’ (combination)이라 명하고, 기의 그리고/혹은 기표의 부분적 유사성의 관계에 있는 여러 어사들 중 하나를 택일하는 연상관계는 ‘선택’ (selection)이라 명명한다. <<말한다는 것은 몇 개의 언어학적 단위의 ‘선택’과 그것들을 보다 복잡한 언어학적 단위로 만드는 ‘결합’을 내포한다. 그것은 어휘의 층위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발화자는 단어들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결합하여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구문체계에 부합하는 문장들을 만든다. 또한 문장들을 결합하여 언술들을 만든다.>> 그러니까 연사관계 혹은 결합은 언술의 구성요소들이 ‘인접성’ (contiguity)의 기저에서 언어 시퀀스를 만드는 양태이며, 연상관계 혹은 선택은 발화자가 수신자와 공동으로 소유하는 언어목록에서 언술을 구성하는 요소를 고르는 양태다. 여러 어사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한 어사의 기의 그리고/혹은 기표와 유사한 (similar) 다른 어사로 ‘대체’ (substitution)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사실, 선택과 대체는 동일한 행위의 양면이다.>>

환유는 언어의 ‘결합’ 양상과 구조적 상동 (homology)이다. 환유는 어떤 개념, 어떤 대상과 ‘인접성’의 관계 속에 있는 다른 사물의 어사로 어떤 개념, 어떤 대상을 말하는 언어현상이기 때문이다. 총과 검은 군대와 밀접한 위치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군대의 환유다. 카메라, 필름, 인화지 혹은 암실은 사진가와 인접하기 때문에 사진가의 환유다. 엘튼 존과 물리적 접촉 관계에 있는 특이한 안경과 피아노는 그를 표상할 수 있는 환유다. 은유는 언어의 ‘선택’ 양상을 보여주는 언어현상이다. 은유는 어떤 추상적 개념, 사실을 그 기의 그리고/혹은 그 기표와 부분적으로 닮은, 그러나 본래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구상적인 어사로 대체하는 문채다. 불꽃은 정열의 은유며, 저울은 정의로운 재판의 은유다. 머리는 정신의 은유며, 젖가슴은 모성과 여성성의 은유다.  
환유와 은유의 예를 야콥슨이 인용한 러시아 혼례가의 의역을 통해 계속하면,

빛나는 매 한 마리 언덕 넘어 날았고,
힘찬 말 한 마리 정원으로 달렸다.
용감한 신랑 현관을 향했고,
와시리는 저택으로 걸었다.

‘빛나는 매’, ‘힘찬 말’, ‘용감한 신랑’ 모두는 ‘와시리’라는 인물의 외면적, 내면적 속성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와시리’라는 청년의 이름을 ‘대체’한 은유들이다. ‘빛나는 매’는 로고스, 이성으로서의 ‘빛’과 ‘매’의 날쌤, 날카로움의 속성을 동원하여 ‘와시리’의 날카로운 지성과 같은 속성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러시아의 혼례가와 여러 다양한 외설에서 나타나는 ‘힘찬 말’은 은근히 혹은 명백하게 남근을 상징한다.>> 따라서 ‘힘찬 말’은 ‘와시리’의 남성다움의 은유다. 그런데 ‘힘찬 말’은 다른 한편으로 ‘용감한 신랑’의 환유이기도하다. ‘와시리’와 ‘힘찬 말’은 물리적 접촉 속에 있는 소유자와 소유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접성을 통해, 소유주를 소유물로 대체하는 환유는 신부를 암시하는 이미지에 전적으로 적용된다. ‘와시리’가 향해 다다가는 ‘정원, 현관, 저택’은 신부가 거주하는 생활공간이다. 따라서 이 거주공간들은 인접 관계에 의해 신부의 환유적 이미지가 된다. 신부와의 물리적 접촉을 위해 ‘날고, 달리고, 걷는’ ‘와시리’는 곧 인접성의 관계를 통해 신부의 환유가 될 것이고, 신부 역시 ‘와시리’의 환유가 될 것이다.

인용한 러시아의 혼례가의 은유에  따르면, ‘와시리’는 ‘빛나는 매’, ‘힘찬 말’ 그리고 ‘용감한 신랑’이다. 혼례가는 은유적 이미지들을 통해 ‘와시리’의 육체적, 정신적 면모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와시리’라는 이름으로 명명되는 인물과 유사성 (similarity) 혹은 닮음 (resemblance)의 관계 속에서 은유적 표현들은 ‘와시리’의 정신과 육체를 묘사하면서 그의 문학적 초상을 구현한다.

은유의 실현은 문학적 초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상적 초상 역시 재현하는 인물과 관련된 이름의 은유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인물과 유사성, 닮음의 관계 속에서, 도상적 초상은 명명된 이름이 지시하는 인물을 생생하게 구현한다. ‘빛나는 매’, ‘힘찬 말’이 명명된 이름 - 와시리 -의 추상적 전체성이 드러낼 수 없는 구체적  개성을 드러내듯이, 도상적 초상 역시 모델의 전체를 단번에 지칭하는 이름을 완벽하게 대체하면서, 그의 고유한 특성을 시각화한다. 도상적 초상은 이름을 통해 지시된 인물을 닮음의 관계 속에서 대체한다. 모델 얼굴의 미묘한 질감과 볼륨을 2차원의 평면 혹은 체온 없는 질료에 미메시스 (mimesis)를 통해 모델의 형상을 옮기는 초상은 모델 이름의 은유다.

은유의 정의는 언제나 시각의 영역에 속하는 어사를 차용해왔다. 은유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제시하는 문채로 정의돼 왔고, 은유의 계기는 닮음, 유사성, 비슷함처럼 시각의 판별기능에 의존하는 어사들로 설명됐다. 은유를 시각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원류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은유는 <<‘이미지를 만든다’. 축어적으로 번역하면, ‘눈에 보이게 한다’ (『수사학』, III, 10, 1410 b 33).>> 초상이 은유의 계열체인 까닭은 이름이 지칭하고 있는, 그러나 눈앞에 부재하고 있는 인물을 ‘눈에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름의 소유자를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이름의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름은 <<항구적으로 그리고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단 하나뿐인 개인을 지시할 수 있는 사회적 신원 확인의 표지다>>. 그러나 이름은 그 소유자를 묘사하지 않는다. 그를 상술하기 위해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은 피상적으로 이름을 가진 자를 일컫는다. 그러나 그 일컬음은 총체적이다. 이름은 단 한마디로 이름을 가진 자 전체를 말한다. 이름은 누군가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 명사가 아니라, 그 누구의 텅 빈 전체를, 무수한 담론으로도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총체성을 일컫는다.>> 이름의 의미는 그 ‘텅 빈 전체를’ 채우려드는 묘사들에 의해 현동화 (actualization)된다. 묘사는 상황의 총합, 즉 시대, 장소, 공동체의 정서, 묘사하는 자의 견해 등 확정 지울 수 없는 상황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이름은 특정 개인을 명백히 지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텅 빈 무정형, 밑 빠진 비정형으로 남는다. 모델과의 닮음에 의거하여, 초상은 이 텅 빈 비정형에 의미의 형상 (figure)을 부여하는 이미지다. 초상은 이름에 잠재된 의미를 현동화한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이름이 지칭하는 자의 ‘텅 빈 전체를’ 그의 환유적 이미지들과 얼굴표정으로 채우면서 그에 대해 그 무엇을 말한다. 그에 고유한 특징, 그의 자기주장을 선택하면서 초상은 이름의 ‘밑 빠진 총체성’의 바닥을 메운다. 형상과 더불어 잠재적 의미상태에 머물던 이름은 구체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미지는 지각할 수 있는 구체적 양상 속에서, 이름의 잠재적 의미를 구체화한다. 전통적 수사학이 은유를 어떤 추상적 개념, 사실을 유사성의 관계 속에서 구상적인 어사로 대체하는 문채로 규정했다면, 초상의 공간에 위치하는 이미지는 모델 이름의 은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초상의 이미지는 비의미와 접해있는 있는 이름의 의미를 지각할 수 있는 구체적 양태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가리키는 인물과의 유사성, 닮음을 통해, 초상의 이미지는 이름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초상은 형상으로 된 이름이며, 이름이 형상으로 나타남이다.>>

초상은 이름이 떠올리는 한 개인의 얼굴을 모방하면서, 그에 대한 이미지를 구성한다. 은유를 특징짓는 ‘필터’ 혹은 ‘스크린’ 효과에 의해 초상의 이미지는 이름의 ‘텅 빈 전체’로부터 어떤 부분은 선택하고, 다른 부분은 제거하고, 어떤  세목은 강조한다. 간단히 말하면, 모델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조직한다.  관점을 조직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할 필요도 없이 모델의 직업과 관련하여 ‘선택’되고, ‘강조’되는 신체부위다. 그 신체부위에 대해 시대와 사회가 공유하는 연상체계와 모델의 이름이 상기시키는 직업의 상호작용을 통해 모델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우선 어빙 펜(Irving Penn)에게서 전형적인 예를 구하기로 하자. 

3076066253_8tSLP6mz_60f39eded2a0437e6ed28846708bad4983562cf3.jpg어빙 펜은 남불 칸느에 위치한 피카소의 별장, ‘캘리포니아’에서 칠순이 넘은 스페인 태생의 예술가를 찍었다. (사진 1.) 중절모를 쓴 노년의 피카소는 귀의 일부와 입을 수로 장식한 외투로 가리우고 정면을 응시한다. 모델의 정 좌측에서 오는 빛은 얼굴의 절반만을 비추는 까닭에, 나머지 절반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초점은 오직 눈에만 맞춰져있어, 눈과 동일한 거리에 있지 않는 다른 부분은 약간 흐려져 있다. 부수적인 부분을 비네팅 (vignetting)함으로써 이미지의 한 부분만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아웃포커싱 기법을 사용하여 초점을 맞춘 왼쪽 눈만을 강조했다. 게다가 주변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은 화면의 정 중앙에 위치해 보는 사람의 시선을 독점한다. 어빙 펜의 초상은 피카소라는 인물로부터는 얼굴 부분만을 ‘선택’했고, 얼굴로부터는 왼쪽 눈만을 ‘선택’했다. 그리고 아웃포커싱을 통해 오직 왼쪽 눈만을 ‘강조’했다. 요약하면, 어빙 펜은 피카소를 밝고 투명한 눈의 소유자, 단호한 시선의 소유자로 부각시켰다.

 

눈은 무엇보다 영혼, 지성, 정신을 표상하는 은유적 이미지의 전형이다. 눈의 의미작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성의 현현과 관련을 맺는다. 눈을 통해 영혼이 드러나고, 눈은 정신의 통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은유의 변이형 (variant)은 수없이 많다. 이러한 눈의 은유적 연상체계는 기원을 상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것은 서구의 근대 사회가 합리적 주지주의, 이성 중심주의를 표방하면서, 로고스와 관련된 눈의 신격화는 더욱 강화되었음에 틀림없다. 오늘의 서구를 태동시킨 르네상스 시대의 한 시구는 눈이 신체세부의 위계서열 중 최상단에 흔들림 없이 자리 잡았음을 증언한다.

눈은 정신이 배우고 맛보는
제 일의 관문이라 불린다.
귀는 두 번째로 말과 더불어
지성에 힘과 활력을 준다.

인용 시구와 500년의 시차를 두고 롤랑 바르트는 영혼과 정신으로서의 눈이라는 해묵은 연상체계를 신경 심리학이라는 첨단 학문의 주장을 원용해 또다시 반복한다. <<신경 심리학은 시선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확증했다. 생명이 태어난 첫 며칠 동안은 부드러운 빛을 향한 눈의 반응이 있다. 일주일이 지나면, 갓난아이는 보려고 눈을 돌린다. 그러나 그 방향은 막연하고 머뭇거린다. 이 주일 후에는 가까운 물체를 응시할 수 있다. 육 주 후에는 시선이 단호해지고 선택적이 된다. 즉 응시하기 시작한다. 이 육 주가 인간 ‘영혼’이 태어나는 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눈에 관련된 연상체계가 이러하다면, 어빙 펜의 피카소 초상의 의미는 명백하다. 어빙 펜이 피카소의 눈만을 ‘강조’함으로서  ‘조직’ 하고자 한 피카소의 이미지는 명확하다. 명민한 지성과 영혼을 소유한 예술가로서의 파블로다. 초상은 또렷하게 포착한 눈을 통해 칠순의 나이에도 시들 줄 모르는 예술가의 지력과 창조성을 부각시킨다. 이에 따라 ‘제거’된 것은 탁월한 손의 기예를 가진 피카소다. 날카롭게 재현된 눈은 피카소의 장인적 면모를 무화시킨다. 또한 식욕과 발설의 기관을 완전히 가려버림으로써 한평생 욕망의 삶에 몰입했던 피카소를 지워버린다. 「별장, 캘리포니아에서의 파블로 피카소」는 무엇보다도 탁월한 지성의 피카소다. 피카소와 물리적 접촉 속에 있는 고급스런 중절모, 정교한 수가 놓인 외투는 노년에 든 화가의 정신성, 품위를 더욱 고양시키는 환유들이다. 물질의 안락함 속에서 혜안의 예술가는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한다. 그곳은 그의 초상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눈이다. 피카소는 단호한 시선으로 관객들을 그의 창조적 지성에 복종시킨다. 이 복종을 통해 그의 천재성을 영원히 기념하게 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서 명민한 지성의 예술가로 남으려는 상징적 초월을 시도한다. 피카소 초상의 의미작용과는 대척점에 위치하는 어빙 펜의 다른 초상을 인용해보자. 그것은 1964년에 찍은 데이비드 스미스 (David Smith)의 초상이다. (사진 2.)

데이비드 스미스는 피카소, 훌리오 곤잘레스 (Julio Gonzalez)에 뒤이어 직접금속 조각 (direct-metal sculpture), 즉 금속을 직접 절단, 용접하여 형상을 제작하는 조각에 30년대 말부터 몰두하여, 현대 조각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예술가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에 최초로 금속으로 공간을 소묘하는 예술을 도입했고, 최초로 용접기와 철, 합금속을 사용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또한 그는 피카소, 곤잘레스에게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콜라쥬 조각, 즉 기계부품을 있는 그대로 취하거나 혹은 새롭게 배치하는 조각을 최초로 시도했다. (...) 우리가 찬탄하는 것은 그가 이룩한 작업방식의 혁신이 아니라, 스미스 예술의 개성과 독창성이다.>>  3076066253_wrPOIsF9_f0463b62f1c85ccbe8b1533a5a9f36a4456dc738.jpg
     

 

<<무수한 담론으로도 채울 수 없는>> 스미스의 전체성에서, 초상이 ‘선택하고,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도 쇠와 불을 다루는 장인으로서의 스미스다. 그의 허름한 복장, 험한 작업으로 망가진 엄지손톱, 담배 파이프를 움켜쥔 불에 단련된 손, 초점을 잃은 시선, 육감적인 혹은 야수적인 입술과 코 등 화면의 어떠한 요소도 지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담고 있지 않다. 지성과 창조적 상상력의 조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속용접에 생계를 기댄 단순노동자의 외모다. 어빙 펜은 데이비드 스미스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쇠를 두드리고, 자르고, 용접하는 대장장이로 ‘조직한다’.

그런데 대장장이는 예술가라는 직업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하고, 17세기 이후의 서구 근대사회가 지속적으로 강화시킨 지적이고 고귀한 예술가 (artist)라는 개념 이전에는, 대장장이는 창조적 장인 (artisan)의 신화적 원형이었다. 화산의 불로 아킬레스의 무기와 헤라의 왕관을 만든 헤파이스토스는 가장 뛰어난 손의 기예 (art)를 가진 신이었다. 그래서 불과 금속, 제련술의 신은 그리스 신화의 최초의 여자 인간, 판도라를 진흙으로 빚어 만든다. 미노스를 위해 미궁을 건축하고, 미노스의 아내를 위해 황소를 조각하고, 제 아들에게 날개를 만들어 주었던 전방위 장인의 상징, 다이달로스는 화산을 대장간으로 쓰는 헤파이스토스의 인간화된 분신이다. 어빙 펜의 데이비드 스미스는 <<예술가의 장인적 요소를 거부하고, 예술을 의도로 환원시키는>> 20세기의 전반적 예술 상황 속에서 손으로 태고적 장인의 삶을 다시 사는 대장장이-예술가에 대한 예찬이다. 따라서 대장장이로서의 스미스의 초상은 현대 미술의 극단적 주지화 경향에 대한 비판을 내재화한다. 미술사가, 포시옹이 예술가의 신화적 기원인 헤파이스토스를 암시하며 달뜬 언어로 손을 예찬한 것과 그 의미의 맥을 같이한다.
예술은 자신의 물리학, 광물학을 건설한다. 예술은 손을 사물의 뱃속에 집어넣어 사물에 자기 마음에 드는 형상을 준다. 예술은 우선은 장인이며 연금술사다. 예술은 가죽 에이프런을 걸치고 대장장이처럼 고되게 일한다. 예술은 육중하고, 불타는 것과 겨룬 나머지, 시커멓고, 찢어진 손바닥을 갖는다. 이 거센 손의 격렬함과 정신의 술수 덕분에 인간이 있다.

데이비드 스미스를 헤파이스토스의 후손으로 ‘조직’하는 어빙 펜의 성공은 무엇보다 신체의 세부를 은유적 이미지로 인식한 점에 있다. 사진작가는 지성, 정신의 은유인 머리를 ‘제거하여’ 데이비드 스미스에게서 지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육중하고 불타는 것과 겨룬’ ‘거센 손’의 상흔을 전경에 배치함으로써 헤파이스토스- 스미스의 이미지를 보는 사람의 기억 속에 주입했다.

그렇다고 은유로 사용된 신체의 세부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작용을 띠는 것은 아니다. 모델의 신분, 모델과 사진 작가와의 관계, ‘강조된’ 신체세부와 ‘선택된’ 다른 신체부위와의 관계 혹은 도입된 환유적 이미지와의 관계, 그리고 신체의 표정과 포즈 등 신체세부의 의미작용에 관여하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 눈은 언제나 영혼, 내면성의 은유가 아니다. 머리의 강조는 반드시 고양된 지성, 정신, 로고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3076066253_iNnGZAcf_9004e0fd94c1e86158230584feb1cd921aedc848.jpg유진 스미스 (Eugene Smith)는 1949년, 콜로라도주의 고산지대 휴양촌인 아스펜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촬영했다. (사진 3.) 그것은 5년 뒤 그러니까 1954년, 가봉의 람바레네에 위치한 슈바이처 의료촌의 사진취재의 계기가 된 만남이었다. 신학자, 목사, 철학자, 음악 연구가, 오르간연주자 그리고 의사인 일흔 네 살의 슈바이처 박사에게서 유진 스미스가 ‘선택’한 것은 고개 숙인 헝클어진 백발이다. 화면의 전면을 차지하고, 어두운 배경 속에서 밝게 두드러져 보이는 <<다듬지 않은 머리는>>는, 롤랑 바르트의 피에르 신부 (l`abbé Pierre)의 초상에 관한 분석을 인용한다면, <<여타의 관습, 관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적절히 표명하면서, 성자적 두발형태의 원형과 결합한다. 성자는 무엇보다도 형식적 문맥을 떠난 사람이다. 멋과 유행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성스러움의 개념에 상반된다.>> 헝클어진 머리는 신학자, 목사, 철학자, 음악 연구가, 오르간 연주자인 슈바이처를 후경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의술로 세상에 헌신하는 성자로서 슈바이처를 부각시킨다. 흐트러진 백발은 정장, 하얀 와이셔츠, 나비 넥타이라는 ‘관습, 관례’, ‘형식적 문맥’을 가리울 정도로 ‘강조’된다. 결국 보는 사람의 기억 속에 성자-슈바이처라는 이상화된 이미지만을 남긴다.

 

초상이 효과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모델의 이미지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택한 신체부위가 그의 직업, 그의 특기할 만한 전기사항 혹은 그의 내면성을 표상할 수 있어야 한다. 재현된 신체부분은 모델의 본질적 양상을 구현하여, 그것이 없으면 모델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야 한다. 그러므로 얼굴은 초상에서 특권적 지위를 향유한다. 전 신체 중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절대적 중요성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불변의 인류학적 사실로 남는다. 얼굴은 인간의 신체부위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며, 제일 먼저 보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얼굴을 통해 스스로를 인지하고, 자신을 보여주고, 타인을 확인한다. 그곳은 각 개인에 속한 모든 것을 표상하고, 대표하는 장소다. <<얼굴은 살아있는 형태로 개인의 미세한 그러나 절대적 차이를 묘하게 번역한다. (...) 얼굴은 인간의 실존이 의미를 갖는 원초적 장소다. 얼굴을 통해 각자는 자신을 확인하고, 명명되며, 남성 혹은 여성임을 표한다.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얼굴의 미세한 차이는 각자에게 자기존중의 감정, 자기자신을 확인한다는 감정을 각 행위자에게 추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작용이다. 단 하나만 존재하는 각 인간의 얼굴은 각자의 유일무이한 인생역정에 부응한다.>> 인간 얼굴의 이러한 특권적 위치 때문에, 절반도 채 안되게 드러난 얼굴은 파블로 피카소, 알베르 슈바이처를 재현하기 위한 필요 충분조건을 만족시킨다.

예외적인 경우, 어떤 개인을 재현하는 이미지는 얼굴이 아닌 다른 신체 부위를 선택한다. 이 신체세부가 모델의 이름에 관련된 ‘텅 빈 전체성’에 어떤 형상을 부여하고, 그에 고유한 특성 혹은 전기적 사항을 구체화한다면, 그것은 얼굴을 대체하는 수가 있다. 그의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얼굴과 동등한 자격으로 개인을 표상한다. 사우스워스 (Albert S. Southworth)와 호즈 (Josiah J. Hawes)가 1845년에 은판사진으로 촬영한 「워커 선장의 낙인찍힌 손」은 그 전형적인 예로 남을 만하다. (사진 4.)

두툼한 손바닥의 상단부에는 ‘SS`라는 문자가 좌우로 도치되어 새겨져 있는 바, 그것은 Slave Stealer 즉 노예 도둑을 지칭한다. 달군 쇠로 새긴 약자의 도치현상은 보정렌즈 없이 찍은 은판사진에 나타나는 거울효과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왼손은 실제에 있어서는 조나단 워커 (1799-1878)의 오른손이다.
1844년, 워커는 플로리다 지역을 도망쳐 서인도 제도로 가려했던 일곱 명의 노예를 도왔지만 탈출은 실패로 끝난다. 그 결과 그는 600 달러의 벌금과 일년형, 그리고 ‘SS`라는 치욕적인 고문형을 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은 그의 노예폐지론을 막지 못한다. 그는 강연을 통해 계속 노예제 폐지를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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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워커 선장의 전기적 사실은 이 손의 사진적 기록이 무엇을 목표하는지를 분명하게 한다. 「워커 선장의 낙인찍힌 손」은 한 노예폐지론자의 고귀한 삶을 기념하고자 했다. 인간애의 시련이 각인된 손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인과 후세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고자 했다. 한 개인의 삶을 기념하고, 그만의 고유한 형상을 친지와 후세의 기억 속에 길이 보전하려는 기획은 초상 생산의 기원에 위치한다. 망각이라는 기억의 죽음을 거부하고, 영원히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살고자하는 욕망, 사랑하는 자의 육체적 죽음, 혹은 떠남을 그를 닮은 형상을 간직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욕망이 미술의 기원에 초상을 위치시켰다.

워커 선장이 자신의 손을 최대한으로 펼쳐 낙인을 드러내 보이고, 사진사들이 선명한 클로즈업으로 낙인찍힌 손을 찍은 것은 무엇보다 보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부과하려는 사진적 장치들로 보인다. 미학적 우려를 뒷전에 미루고, 과학을 위한 자료사진이 선호하는 정면성과 클로즈업 촬영을 선택하여 그의 시련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최대한으로 내보여, 보는 이들의 공손함을 요구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정면성의 원칙을 통해 자신의 예외적 고난을 정면으로 제출함으로써 보는 사람을 복종시키는 장치로 여겨진다. 비잔틴 성화의 인물들과 유교문화의 고관대작 초상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정면성은 위엄을 표하고, 경배를 요구하는 문화적 형식이다. 「워커 선장의 낙인찍힌 손」은 자부심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존경심을 위해 정면에서 보여지기를 원한다.

「워커 선장의 낙인찍힌 손」은 초상의 해묵은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모델의 삶과 인격을 얼굴 이상으로 함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초상이다. 오히려 얼굴 이상으로 조나단 워커라는 ‘텅 빈 전체’에 구체적 의미를 부여한다. 두툼한 손의 딱딱한 포즈는 더할 나위 없이 워커의 <<영웅적 정신>>, <<차분한 인내심>> 그리고 <<불굴의 용기>>를 구체화한다. 꼿꼿하게 편 손바닥은 <<고통의 붉은 화살촉>>으로 <<비겁한 야수들이 신의 진리를 너의 치욕으로 만들려 했던>> ‘SS`와 더불어 그의 인격, 정신성을 ‘눈에 보이게 한다’.
얼굴 아닌 어떤 신체의 일부가 초상의 정의에 부합한다면, 그 세부는 모델의 직업, 기질 혹은 그의 개인사를 적절하게 드러낸다. 즉 모델의 어떤 본질적 양상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한 인물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선택된 신체의 세부는 다른 신체부위가 허용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구현한다. 은유의 필터 기능에 따라, 선택된 신체부분은 모델의 어떤 양상들은 희생시키고, 다른 어떤 양상은 강조한다. 모델의 어떤 양상에 관한 한, 다른 신체 부위가 선택한 세부보다 더 잘 표상한다. 반면, 모델의 또 다른 양상에 관한 한, 선택한 세부가 가장 잘 표상한다. 그 예를 어빙 펜의 루돌프 누레예프에게서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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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누레예프가 서구에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 어빙 펜은 그의 초상들을 생산한다. 그 중 하나는 누레예프를 그의 다리만으로 표상한다. (사진 5.) 다리의 완벽한 조형미와 발레에 고유한 포즈는 이 신체의 소유자가 무용수임을 예상케 한다. 훈련으로 단련된 근육질과 핏줄은 무용수의 힘찬 도약과 율동을 암시한다. 선택된 신체기관은, 그것에 고유한 신체적 기능과 직업에 관련된 독특한 자세를 통해, 누레예프라는 이름의 ‘텅 빈 전체’를 오직 탁월한 무용수로서만 묘사한다. 포즈를 취한 다리와 모델의 이름, 누레예프는 서로 갈마들며 모델에 대한 이미지를 발레계의 세계적 신성으로 ‘조직한다’.

위의 사진과는 달리, 1965년, 뉴욕에서 찍은 그이 한 초상은 상반신만을 담는다. (사진 6) 선택된 신체부위를 제외한다면, 이 초상은 1961의 사진과 거의 동일한 사진적 조건들에 놓인다. 빛과 어둠의 분할을 강조하는 측광조명, 어떠한 장식도 없는 배경, 그리고 동일한 사진작가, 모델을 공유한다. 완전히 다른 점은 파리의 사진은 하반신을 담고, 뉴욕의 사진은 상반신을 촬영했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전자는 탁월한 기량과 발군의 육체적 조건을 소유한 무용수, 누레예프를 ‘강조한다’. 반면, 상반신의 누레예프는 발레와는 무관한 어떤 것을 ‘조직’하고자 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  뒤로 젖힌 양팔, 독특한 모자와 복장은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발레단에서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고, 스물 셋의 나이에 서구로 망명한 청년의 기질, 성향 등을 암시한다. 그의 직업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그의 심리적 개성을 보는 사람의 기억 속에 부과하고자 한다.

3076066253_j6p3x42q_06c01e42e87e6eddc5c49ce4811a847f9f8bfc26.jpg각 신체 세부의 육체적 기능, 그리고 각 신체부위에 대해 사회가 공유하는 내포 (connotation)와의 관계 속에서, 얼굴 없는 초상은 얼굴이 가져올 수 없는 혹은 얼굴로서는 태를 부려야만 허용되는 의미작용을 어렵잖게 구현한다. 1917년 봄부터 1937년, 사진기를 놓는 날까지 아내,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의 전 신체의 세부를 초상의 형태로 남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는 그것을 통찰하고 있었다. 어떻게 얼굴을 통해 성적 유혹으로서의 동반자를 ‘강조’할 수 있겠는가? (사진 7) 억지 표정을 짓지 않는 한, 어떻게 얼굴의 재현이 부드러운 마음 혹은 상처받기 쉬운 심성의 오키프를 ‘조직’할 수 있겠는가? 8스티글리츠가 얼굴에서 음부에 이르는 오키프의 전 세부를 약 500 장의 음화 속에 고정시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얼굴 아닌 신체의 선택은 각 신체기관에 연결된 감정적, 이념적 값들을 제것으로 삼는다. 가슴, 심장은 감정, 심성과 같은 것을 제 몫으로 차지한다. 유방에서 허벅지에 이르는 부분은 성적인 가치를 주로 수용할 것이다.

 

1930년,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독특한 예술적 감수성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우아한 손의 자태를 기념하는 초상을 남긴다. (사진 8) 촉각기관은 1929년 오키프가 뉴 멕시코의 사막에서 가져온 탈색된 짐승 두개골을 보듬는다. 손은 삶의 덧없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인지하고, 생명의 유한성에 관한 혼돈스럽고 불안한 질문들을 형상화할 것이다. 짐승 두개골은 그녀의 30년대 회화의 라이트모티프로 사용되는 화가, 오키프의 환유적 이미지다.

손의 자태가 보여주듯이 「손과 짐승 두개골」은 스티글리츠와 오키프의 애정 어린 공모 속에서 실현된 총체적 초상이다. 한편으로 사랑하는 아내의 초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예술가의 초상이다. 사랑하는 자의 우아한 손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아내의 예술가적 면모를 고취하고자 했다. 스티글리츠에게 있어서, 오키프의 손은 시간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또한 그녀의 예술적 재능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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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바퀴를 보듬는 1933년의 손의 초상 역시 총체적 초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진 9)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 그녀의 예술가적 기질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욕망은 손의 우아한 연출을 가져오고, 세련된 손은 그녀의 우상, 그녀의 환유인 V-8의 바퀴에 고상하게 손을 얹는다. 그런데 뚜렷하게 보이는 V-8이라는 자동차 마크는 단지 화가의 개인적 취향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포드 컨버터블 V-8 의 의미작용은 중성적이 아니다. 그것에는 자동차의 신화가 스며있다. 컨버터블 V-8은 절대적 자유를 상징한다. 빛나는 바퀴는 모든 종류의 구속에서 해방된 자유의 길을 내포한다. 자유의 상표를 보듬는 손은 낭만주의가 발명하고, 몇몇 예술가의 일화가 강화시킨 예술가의 신화를 상기시키는데 있다. 빛나는 컨버터블의 바퀴는, 랭보의 말을 빌린다면, 예술가의 <<자유로운 자유>>를 상징한다. V-8 바퀴와의 환유적 감염에 의해, 예술가 오키프는 자유의 길을 추구하는 보헤미안으로 내비친다. 「조지아 오키프; 초상」은 우리 시대의 자동차 신화를 활용하여, 재현된 손의 소유자에게 낭만적 예술가의 신화를 부여한다.

 

3076066253_fsGgcFe3_7f2145fc1035991a6eb9faff7b7e02255903e315.jpg선택되어져 초상의 공간에 들어온 신체의 일부는 모델의 이름에 잠재된 의미를 구체화하고 현동화시킨다. 이름의 은유인 선택된 신체의 세부는 은유의 필터 혹은 스크린 효과에 의해 이름이라는 무정형적 상태에 구체적 의미의 형상을 준다. 그 구체적 형태는 재현된 신체의 소유자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조직한다. 종종 초상의 공간에는 모델과 인접성의 관계에 있는 환유적 사물들이 도입되어, 모델의 사회적 신분, 직업, 내면성을 묘사한다. 환유적 이미지는 동어반복적일 수도 은유적일 수도 있다. 부연하면,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해박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짐승의 두개골은 이 여류화가에 대해 아무 것도 더 말하지 않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은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그녀의 예술적 탐색의 은유일 수 있다. 본고는 은유와 환유라는 수사학적 도구에 의거한 분석의 대상을 사진 초상에 한정시켰다. 그러나 그 분석의 틀은 데생, 회화, 조각 등 모든 종류의 초상에 확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시물은 권학봉님에 의해 2018-04-04 21:05:40 사진조명 동영상 강의에서 복사 됨]

2 Comments
22 비목어 2015.09.26 12:30  
참묘하네요,,,,
지금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민음사 책을 읽고 있는데,,,
워치님이 올려준글에,.,,,,하필 조지아 와 스티글리츠 관련 사진이나오네요.....

즐거운 명절되셔요
26 stormwatch 2015.09.27 20:43  
네 감사합니다

비목어님도 평안한 추석연휴 되세요~~

축하합니다. 47 럭키 포인트를 받으셨습니다.